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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바다에서 건져 낸 풍성한 계절의 맛, 통영

삼면의 바다와 세로로 길게 뻗은 지리적 특성, 사계절 뚜렷한 기후에 따라 한국의 식문화는 지역의 특색을 갖고 이어져 왔다. 지역이 가진 우수한 식재료와 문화는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희미해져 간다. 40년 가까이 통영에 살며 제철 재료의 ‘맛’에 통영의 ‘멋’을 더하는 <통영음식문화연구소> 이상희 선생님을 만났다. ‘음식은 말로 설명하지 말고, 그저 맛있어야 한다.’는 그는 음식을 통한 소통과 교감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계절을 품은 제철 재료를 만나면, 함께 먹을 누군가를 떠올리며 그 마음을 담아 요리한다.

 

 

 ‘작지만 경쟁력 있는 도시, 통영’

오롯이 식문화 하나만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도시가 우리나라에 몇이나 될까? 나는 통영에 와서 자리를 잡았다. 이곳, 저곳 여행을 다녔지만, 결국 그 끝은 ‘충무’라 불리던 통영이었다. 통영은 물적 자원이 매우 많다. 쉽게 볼 수 없는 식재료가 풍성하고, 골목으로 접어들면 맛있는 냄새에 이끌리기 일쑤다. 풍부한 해산물이 나는 자연환경과 예로부터 삼도수군통제영의 존재를 시작으로 여러 근대 식당, 다찌 문화까지 축적된 식문화가 곳곳에 스며 남아있다.

 

 

통영은 나에게 만만하다. 친구들도 만만한 친구가 좋듯 지역도 그런 것 같다. 통영의 구도심은 아주 작은데, 그곳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고 각자 제 기능을 하고 있다. 작지만 모든 게 들어있으니 만만하고, 만만하니까 편하다. 가끔 어떤 지역에 가면 너무 광범위해서 힘듦이 느껴지는 도시가 있다. 통영은 그런 힘듦을 느낄 새가 없다.

고성, 거제와 같은 고도시에 비해 400년밖에 되지 않은 짧은 도시지만, 다양함이 쌓여 독특한 문화를 갖고 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아침에 눈을 뜨면 ‘이곳이 최고다’라는 생각이 든다. 단 한 번도 통영에 괜히 왔다 생각한 적이 없다. 여러 가지 면에서 통영은 아직도 경쟁력 있는, 살만한 곳이다.

 

 

‘깊고 진한 바다의 맛, 어간장과 합자국’

홍합은 가을부터 살이 차기 시작해 잠깐 끓여도 뽀얗고 달짝지근한 맛이 우러난다. 통영에서는 잡채에 육고기 대신 홍합을 넣기도 한다. 단연 감칠맛의 최강자로 홍합은 통영 요리에 빠질 수 없는 천연 조미료다. 특히 홍합 국물로 만든 합자국은 향과 맛이 뛰어나고, 영양가가 높은 식재료다.

합자국은 40-50kg의 자연산 홍합을 삶아 만든다. 삶고, 건져내고, 또다시 삶는 행위를 반복하여 졸인 홍합 국물을 가마솥에 계속 끓인다. 눌어붙을 수 있어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불 앞을 계속 지켜야 한다. 그렇게 7, 8시간 반복해서 곤 국물은 칠흑같이 어두운 진액이 된다. 합자국을 만드는 과정이 마치 조청을 고는 것과 같아 ‘바다의 조청’이라 불리기도 한다. 인고의 시간 끝에 식탁에 올라오는 합자국은 천연 조미료로 쓰이거나 식욕을 돋기 위해 밥 한 숟가락에 비벼 약으로 먹기도 했다.

 

 

 

통영의 깊은 맛이 담긴 ‘통영 찹쌀 어간장’. 어간장은 신선한 멸치 어간장에 찹쌀 풀, 다시마 등 해조류를 넣어 끓인다. 재료들이 가라앉아 찹쌀 풀과 골고루 섞이고, 발효되는 과정을 거쳐 연하고 부드럽다. 다시를 뽑지 않아도 훌륭한 감칠맛을 자랑해 입맛이 없을 때 물에다가 어간장을 타 국수를 말아 먹곤 한다.

아직 어간장은 멸간장, 피시소스 등 식(食) 분야에 명칭이 정리되지 않은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여러 지역에서 어간장을 판매하고, 점차 많은 사람들이 어간장의 매력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깊은 맛을 지는 어간장은 콩간장과는 또 다른 매력을 갖고 있다.

 

‘소반 문화의 원형. 통영반’

음식 공부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소반과 연관성을 띤다. 소반은 지역, 수형, 사용법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된다. 다양한 지역별로 분류되었으나 현재는 해주반, 나주반, 통영반만이 남아있다. 가장 우수한 품질을 갖고 있는 통영반은 근대까지 가정집에서 사용하고 있는 원형 소반의 시초다. 문헌에 따르면 통영 소반은 우리나라 소반의 원형으로 나와 있는데, 다른 소반에 비해 튼튼하므로 오랜 시간 살아남을 수 있었다. 3, 4가지로 분류되는 해주반, 나주반과 달리 10, 20여 가지의 형태로 분류되어 그 명성을 잇고 있다.

 

 

타지역의 소반 문화는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으나, 통영반의 경우 소반장님(인간문화재 故추용호 장인)께서 별세하신 이후 맥이 끊기고 있는 것 같다. 최근 외국인들의 소반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고, 전국 각지에서 통영반 입문을 위해 찾아오는 모습을 보면 다양한 형태로 재탄생하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고 있다.

 

‘공예는 그 나라의 특색이 있어야 한다. 비교적 자유분방한 편에 속하는 우리나라의 공예는 자유로움과 다양성이 공예에 접목되어 재탄생하는 특색을 띤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런 특색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 같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나 술도 지역마다, 만드는 집마다 차이가 있어 정확하지 않지만, 그 특색이 뚜렷해 다채로운 맛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장점을 오히려 전문성이 떨어져 단점으로 보는 시각들이 생기다 보니 점차 일률적으로 변한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통영은 ‘다찌’를 먹는다.

남쪽 마을의 바닷가다 보니 일본의 잔재가 오랫동안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다찌는 ‘서서 술을 마신다’는 일본어 타치노미(立ち飮み)에서 파생된 단어로 쉽게 말해 ‘저렴하게 먹는 실빗집’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실 다찌집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실비 싸게 먹는 허름한 식당, 서서 간단하면서도 푸짐하게 먹는 식당을 향하는 사람들이 ‘다찌 먹으러 가자’는 말을 하며 다찌집이라는 단어가 생겼다. ‘한양집’, ‘청주집’, ‘OO실비’ 같은 실빗집의 상호들이 다찌집이 되고, 그렇게 오늘날의 다찌문화가 형성되었다.

 

 

통영의 다찌문화는 작은 구도심 성격도 함께 맞물려있다. 해산물이 많이 나는 통영의 특성에 주인들의 음식 수준, 몇 안 되는 가게에 갖춰진 솥의 수량 등 작은 도시에서 상업적 경쟁력이 동반하며 서로 경쟁하고 계속 발전하게 된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식사다찌, 반다찌 등 다양한 형태의 문화로 아직까지 자리 잡고 있다. 음식을 내주는 주인장은 그날의 신선한 부위를 한점 더 내어주기도 하고, 각 테이블에 동시에 앉아 다 같이 떠들고 얘기하는 다찌의 분위기에서 어떠한 애환이 느껴지기도 한다.

 

‘통영의 다찌는 지역에 정착한 문화 그 자체이다. 식재료와 함께 대표적인 식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문화를 인정하고 축제와 같은 행사 등을 기획해 이 문화를 널리 알린다면, 전국에서 맛있는 음식과 즐거운 식문화를 즐기기 위해 통영에 모여들 것이다.’

 

 

지역에 잔존한 우리 식재료와 식문화가 조금씩 소멸되다 보니 소수의 기억 속에만 남는 듯하다. 대량생산에 적응된 요즘 시대에는 ‘비싸다’는 인식이 많아 더욱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지역 소멸이 심각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요즘, 자연스러운 환경 변화에 따라 지역에 뿌리내린 문화를 인정하고,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통영에서 만난 어간장과 합자국, 통영반과 다찌문화처럼 지역의 특성에 따라 발생하는 것들은 우리가 지켜야 할 중요한 문화유산이 아닐까.